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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린네 [Descartes René]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유명한 데카르트는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려지고 있지만 17세기의 과학 혁명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고, 수학에서도 좌표를 만드는 등의 지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1596년 프랑스 투렌 지방의 소도시 라에에서 부유한 법률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의원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14개월 쯤 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데카르트는 외활머니 손에 자랐으며 열 살 무렵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인 라 클레쉬 콜레쥬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8년 동안 고전, 수사학, 철학, 역사, 물리 등을 공부했다. 철저하게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은 이 시기의 영향은 후에 그의 저서 여기저기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학교 기숙사의 규칙이 엄격했지만 데카르트는 기숙사에서 늦잠을 잘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정도로 몸이 약했다. 어느날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천장(어디서는 창문이라고도 함)을 바라보다 평면좌표계를 생각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라 플레쉬를 졸업한 데카르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프아띠에 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수학, 자연과학, 법률학, 스콜라철학 등을 배웠으며 수학이야말로 여지가없는 사실을 추구하는 철학의 핵심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20살인 1616년 ‘세상이라는 큰 책’을 배우기 위해 프아띠에를 떠났다.
2년 후인 1618년 네덜란드에서 군대에 참여하였고 1620년 바이에른 막시밀리안 대공의 군대 소속으로 프라하 근처 바이센베르크 전투에 참전하였다. 병영의 막사에서 철학적 사색에 잠기곤 했던 데카르ㅌ는 1619년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이 꿈을 통해 학문과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목표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1620년 제대후에 프랑스로 귀한하여 수학, 자연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고 1627년 잠시 종군하기도 했으며 1628년 카톨릭교회의 영향력이 강한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분위기의 네덜란드로 이주한다. 네덜란드에서 약 20여년간 지내면서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을 저술하였다.
데카르트의 큰 업적 중 하나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점이었다. 수평 및 수직의 두 축을 기준으로 양과 음을 구분해서 4개의 영역(4분면) 나타내는 방식을 제안했고,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모든 원추곡선을 2차방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수학과 과학의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지수의 표현방식을 고안했으며 “실계수의 n차방정식의 실근의 개수는 방정식을 이루는 항의 부호가 바뀌는 수와 근의 수가 같거나 그 수보다 짝수 개만큼 적다.“라는 데카르트의 부호법칙도 만들어냈다.
1649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롬에서 여왕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아카데미 창립에도 참여하였으나 이듬해인 1650년 데카르트는 스웨덴 스톡홀롬의 집에서 폐럼으로 사망했다. 스웨덴이 카톨릭국가가 되기를 희망했던 교황청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불온시 하였으며 그가 사망한지 13년 후인 1663년 데카르트의 저서를 금서목록에 올렸다.
한편, 그의 고향 라에는 1996년 데카르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데카르트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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